새해 첫 아기 울음, 제일병원에서 못 듣는다
올해는 강남차병원에서 홀로 기자들을 맞을 가능성이 크다. ‘출산 왕국' 제일병원이 폐원 위기를 맞아 역사 속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기 때문.
제일병원은 28일 환자들에게 "병원 사정으로 인해 당분간 진료 및 검사의 정상적 운영이 불가능하오니 이 점 양해 부탁드린다"고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지난달 입원실과 분만실을 폐쇄한 데 이어 외래진료까지 중단한 것.
제일병원은 강남차병원에 앞서 새해 첫 아기 홍보를 하던 곳으로 '출산 왕국', '출산의 메카' 등의 별명을 갖고 있기도 하다. 전국 분만 건수 1위를 꾸준히 지켰으며 배우 김지미, 이영애, 고현정 등 유명 연예인이 이곳에서 아기를 낳았다.
제일병원은 1963년에 서울 중구 묵정동에서 개원한 우리나라 첫 여성전문병원이다. 1987년에는 국내 민간병원 최초로 시험관 아기를 분만하는 데 성공했다.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의 조카인 고 이동희 박사와 노경병 박사가 공동으로 설립했고, 1991년 노 박사가 영동제일병원(현 미즈메디병원)을 만들어 떠나면서 이 박사가 홀로 경영을 맡았다. 1996년 이 박사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삼성의료원 산하로 들어가서 '삼성제일병원'이 됐다가 2005년 삼성그룹 경영진의 결정으로 다시 '제일병원'으로 돌아왔다.
제일병원은 삼성그룹에서 분리된 뒤 조금씩 경영 사정이 어려워졌고 이동희 박사의 장남 이재곤 제일의료재단 이사장의 경영 실패로 어려움이 가중됐다.
제일병원의 분만 건수는 지난해 4202명으로 2012년에 비해 38% 감소했다. 저출산 여파로 분만 건수가 격감했지만 분만 위주의 경영이 계속됐다. 뒤늦게 여성암센터, 건강검진센터 설립 등에 뛰어들었으나 이미 때는 늦어 무리한 투자라는 평이 많았다.
지난 2008년부터 2014년까지 낙후된 건물 리모델링 등 병원 증·개축 공사비 명목 등으로 총 세 차례에 걸쳐 받은 1000억 원대 담보대출도 걸림돌이 됐다. 이사장이 지인에게 건축을 맡겼지만 공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서 자금난이 가속화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이 이사장은 병원 공사비용을 부풀려 100억 원대의 돈을 빼돌린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고 있다.
이 이사장은 경영이 악화되자 주요 보직자들을 해임하고 외부인사를 영입하기도 했지만 자충수가 됐다. 경영진은 의료진 임금을 최대 60%까지 삭감하기에 이르렀고, 노조는 이를 거부하며 지난 6월 파업을 벌이기도 했다. 정상적인 병원 운영이 어려워지면서 의료진과 직원이 대거 퇴사했다.
제일병원은 현재 매물로 나와 있는 상태다. 이달 초 인수협상을 통해 '기사회생'을 도모하고 있었지만, 1000억 원이 넘는 매입비용 부담에 협상이 해를 넘기게 되면서 사실상 폐업 수순을 밟는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새해 첫 아이 탄생을 전했던 제일병원에서는 올해 아기 울음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 카메라 기자들은 2000년대 들어 대표적 여성병원으로 자리매김한 강남차병원으로 몰릴 것으로 예상된다. 제일병원은 현재 외래진료까지 중단하고 응급실만 부분적으로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