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서 가장 끔찍한 죽음”…‘이것’ 노출로 83일간 최악의 고통, 무슨 일?
1999년, 방사능 피폭으로 끔찍한 고통 속에서 사망한 일본 남성
사건은 1999년 9월 30일, 도쿄에서 북동쪽으로 70마일 가량 떨어진 도카이무라에 위치한 우라늄 재처리시설에서 시작됐다. 당시 그는 동료 마사토 시노하라, 감독관인 유타카 요코카와와 함께 질산 우라늄 용액을 침전탱크에 혼합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작업 시 자동 펌프를 이용해 혼합해야 했지만, 당시 해당 시설에서 공정을 간소화하는 조치로 인해 이들은 손으로 직접 용액을 침전탱크에 부었다. 또한 임계 질량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계산 실수로 안전 한도를 한참 초과하는 양의 우라늄을 넣었고, 탱크 내 우라늄의 총량이 허용된 양인 2.4kg의 거의 7배에 달하는 16.1kg에 도달했을 때 연쇄 반응이 시작됐다. 세 사람은 푸른 섬광을 목격했고 즉시 방사선 중독 증상을 보였다. 그리고 방사능 경보가 울렸다.
당시 처리기 위에 서 있던 오우치는 17,000mSv(밀리시버트)의 방사능에 노출됐다. 시노하라는 10,000mSv, 가장 멀리 있던 요코카와는 3,000mSv을 흡수한 것으로 추정된다. 연간 20mSv가 넘는 방사능에 노출되면 위험한 것으로 보며, 5,000mSv이면 치사량으로 간주된다. 당시 오우치가 노출된 방사능 양은 한 사람이 한 번에 피폭된 양 중 가장 높은 양으로 기록됐다.
세 사람은 즉시 병원으로 옮겨졌다. 처음에는 오른손만 빨갛게 약간 부어 있었던 오우치는 곧 지옥 같은 날들을 마주하게 됐다. 방사능이 세포의 염색체를 파괴하면서 상태가 점차 악화되어 갔다.
처음에는 피부가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 다음에는 폐에 물이 차면서 호흡이 어려워져 결국 인공호흡기에 의지해야 했다. 음식과 약물 흡수를 돕는 장내 세포도 죽기 시작해 극심한 위장 통증을 겪었고 매일 3리터씩 설사를 했다. 내부 출혈로 인해 하루 최대 10번의 수혈을 하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도 피부는 계속해서 벗겨져 노출된 피부를 통해 체액이 흘러나왔으며, 눈꺼풀까지 떨어져 눈에 엄청나게 건조해지고 고통스러웠다.
의료진은 피부 이식과 줄기세포 이식 등 여러 가지 치료를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강력한 진통제도 효과가 없었다.
당시 현지 보도에 따르면, 그는 의료진에게 치료를 중단해 달라고 애원하기도 했다. 힘겹게 생명을 유지해가던 그의 심장은 입원 59일째에 멈췄지만, 가족의 요청으로 세 번이나 소생됐다.
오우치의 고통은 결국 입원 83일째인 12월 21일에야 멈췄다. 그는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사망한 것으로 기록됐다. 그로부터 몇 달 후인 2000년 4월 동료 기술자였던 시노하라 또한 40세의 나이에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사망했다. 요코카와는 3개월 후 퇴원할 수 있었지만 후유증이 남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에서는 원자력 산업의 운영 안전에 관한 요건을 강화하는 새로운 법안들이 발의되기 시작했다.
도카이무라 원전 사고 이후 해당 시설에서 10km 내에 사는 주민 31만 명은 대피하거나 일정 시간 동안 실내에 머물러야 했다. 이후 열흘 동안 1만 명이 방사능 검사를 받았고, 이 중 600명 이상이 저농도의 방사능에 피폭된 것으로 확인됐다. 도카이무라 원자력 발전소는 2011년 도호쿠 지진과 쓰나미로 인해 가동이 정지될 때까지 10년 이상 다른 회사에 의해 계속 운영됐다.
끔직한일입니다.방사능 정말 위험합니다.좋은정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