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갈등 1년] 더 나은 의료시스템을 만들 수 있는 기회다
[기고] 강희경 서울대의대 교수
한편, 우리 사회는 전공의가 어떤 일을 하는지, 그들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노동환경에 놓여있는지 알게 되었으며,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던 우리 의료가 사실은 의사들의 비정상적인 노동환경에 기대어 겨우 유지되어 왔고, 의료비용이 폭증하고 있어 이대로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알게 되었기를 희망한다). 별 생각 없이 선배들이 하던 대로, 배운 대로 진료에만 매진하던 기성 의사들 또한 의료 정책이 얼마나 중요하며 또 얼마나 불합리한 상황인지, 의사에 대한 국민과 정부의 불신이 얼마나 뿌리 깊은 지 깨달았고, 과연 지금까지와 같이 진료를 계속하는 것이 자신이 원하는 일인지, 필요한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우리의 의료 시스템이 지속 가능해지려면, 교과서에서 말하는 '적정의료', 즉 ‘1)건강 수준의 향상, 2)지속 가능한 자원 사용, 3)보다 나은 환자 경험, 4)보다 나은 공급자(의료진) 경험’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 의료가 위기에 처한 이유로 대표적인 것은 △(의사 수 부족이 아닌) 공정하지 못한 의료수가 △의료사고를 일반적인 업무상 과실치사상과 같이 취급하는 사법체계 △최선의 결과 외에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문화 △정책실패로 인한 상급종합병원으로의 환자 집중(즉 의료전달체계의 붕괴)을 들 수 있다. 모두 맞물려있는 문제들이라 쉽게 풀어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일차의료의 강화로 지역 의료기관에서 만성질환을 관리하고 건강증진에 힘쓰며, 일차-2차의료기관과 상급종합병원 사이의 네트워크 구축으로 진료 행위 하나하나에 대해 지불하는 대신 국민의 건강 개선에 투자할 수 있는 수가체계를 도입한다면 '적정의료'에 한걸음 더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더불어 의료사고는 ‘의료법정’을 도입해 전문가가 과실 여부를 판단하고, 의료사고의 보상은 사회 안전망 개념으로 국가가 충분히 즉각적으로 보상하되, 추후 의료법정의 판결에 따라 (필요한 경우) 의료기관이 일부를 부담하는 체계를 도입한다면 소위 ‘필수의료 기피현상’을 경감할 수 있을 것이다. 암, 중증질환 등 고도의 진료가 필요한 분야는 필요할 환자들이 제때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지역·권역별, 진료과 또는 질환별 거점센터화를 추진하는 편이 현실적일 터인데, 이는 의사들이 모여 있어야 당직, 입원환자의 제대로 된 진료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상급종합병원의 과다한 진료량이 줄어들고 전공의 인력에 대한 의존도가 감소한 지금이 더 나은 의료시스템을 만들 수 있는 기회일 수 있다. 전공의 인력 없이도 상급종합병원의 진료가 적절히 유지될 수 있는 인력구조와 수가체계를 갖추고, 전공의는 순수한 ‘수련’을 위해 고용하는 형태가 된다면 우리 의료시스템은 보다 더 나아지고 보다 더 지속 가능해질 것이다. 이를 위한 첫걸음은 현재 강행되고 있는 대통령 직속 의료개혁특별위원회의 우선 멈춤일 것이다. 우리에게는 정권의 이익이나 정부의 자존심이 아닌 국민의 건강권, 생명권을 위한 정당한 정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원하는 의료체계에 대한 사회적 합의 도출, 이에 바탕을 둔 보건의료발전계획 수립과 우선순위·시급성에 따른 수행을 요구하자. 적절하고 투명하며 수정할 수 있고 제대로 집행되는 정책을 요구하자. 한편, 의료의 ‘공공성’을 인지하고 의료보험재정이 공공재임을 이해하여 이를 낭비하지 않는 시민의식 또한 필요하다. 우리는 모두 명의에게 진료받기를 원한다. 이를 위해서는 명의를 길러낼 수 있어야 한다. 전공의를 수련할 정도로 실력을 갖춘 병의원에서 진료를 받고자 하는 환자들은 우선 수련의 대상이 되는 데 동의해야 할 것이다.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태가 해결되지 않은 데에는 ‘성급한 여론몰이로 마녀사냥을 하고, 진영 논리에 따른 편가르기로 상대를 공격하고, 자신들의 근거 없는 혐오 감정을 다수의 뜻으로 정당화하며 소수자들을 억압할 수 있’는(<최소한의 선의(문유석, 문학동네)> 발췌) 정보화 사회의 폐해도 단단히 한 몫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95%가 넘는 의과대학생들의 휴학, 한자리 수를 넘지 못하는 전공의 선발 현황이 과연 젊은이들 개개인의 숙고와 독립적인 판단의 결과일까? 의사집단의 익명 인터넷 사이트에서 떠도는 ‘블랙리스트’, 향후 불이익을 주겠다는 근거 없는 협박이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을까? 특히 의과대학생은 이미 의사 자격증이 있는 사직 전공의와는 상황이 매우 다르다. 학칙에 따라 제적될 경우 그 손해를 누가 책임질 것인가?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휴학을 선택한 학생들이나, 타 의료기관에 취업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전공의 선발에 응하지 않는 사직 전공의들이 요구하는 ‘2025년 의대 정원 1500명 증원 반대’, ‘전공의 7대 요구조건', '의대생 8대 요구조건'은 과연 그만큼 절실한 문제일까? 만약 그렇다면, 이들은 요구 조건에 대한 사회적 공감을 얻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또한 학교와 수련병원으로 복귀할 수 있는 현실적인 조건을 마련하기 위해 어떤 대안을 제시했는지도 중요하다.
환자를 진료할 때 의사는 매번 지금의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고민하고 결정한다. 질병의 원인이 있다면 대개 그것을 제거해야 하지만, 흔히 더 필요한 것은 이미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고 회복되게 하는 것이다. 이제 지난해의 경험을 되새겨, 현 시점에서 최선의 방법은 무엇일지, 그 부작용이 심하지는 않을지 고민하여 앞으로 어떻게 할지 결정해야 할 터이다. 더 이상의 피해를 줄이고 우리의 의료시스템을 더 나은 것으로 만들기 위해 함께 뜻을 모을 수 있기를 바란다. 더 나은 의료시스템을 만들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